🧶 오늘의 키워드

#섭식장애 #사회적행사기획 #당사자모임

교수님이 섭식장애 인식주간 얘기를 꺼내신 건, 그 같은 대중적 행사 없이는 섭식장애학회를 설립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다른 뉴스들에 묻혀 곧 잊히고 말 소식으로 그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마침 영국,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매년 2월 말에서 3월 초쯤에 일명 ‘EDAW(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듬해 2월에 한국의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이었어요.

교수님이 연구소 이름으로 지원해 주실 수 있는 자금은 한정돼 있었어요. 그래서 달리 방도가 없다면 병원 강당을 빌려 장소로 활용하고 자원봉사로 참여할 수 있는 분들만 패널로 초청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죠. 인식 ‘주간’이지만 꼭 7일 내내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7일을 꽉 채운 세션을 구상하고 있던 저는 절대 그렇게 행사를 끝내고 싶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소외된 채 암담한 시간을 오래 견뎠을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을 생경한 병원 강당으로 초대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이번에도 ‘환자’로서 의학적 권위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위계적 세팅을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세션들의 얼개를 머릿속에 그린 상태로, 제가 어떻게든 기업 후원을 받아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손택의 말마따나 여자들이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유방암으로 인한 죽음에 있어 여자들이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 같은 ‘인식’의 시대, 돈벌이가 되는 핑크 리본 포장이 ‘치유’를 대체한 시대에 우리는 공공선을 위해 우리의 삶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삶의 이야기는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과거에 로드는 유방암을 둘러싼 침묵에 맞서 글을 썼지만 이제 그 침묵의 자리는 유방암을 둘러싼 언어가 내는 유례없이 끈질긴 소음이 차지하고 있다. 현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침묵을 뚫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묵살해 버리는 소음에 맞서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선뜻 자기 자신과 병을 연관 짓지 않으려 했던 손택과 카슨의 머뭇거림은 이제 늘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병을 앓는 여자들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대체되었다.

(중략)

<2023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 번째 세션 모습. ‘섭식장애 당사자 -내러티브 탐구’를 주제로 섭식장애를 경험한 다섯 명이 모여 이야기했다.ⓒ잠수함토끼콜렉티브

첫해와 두 번째 해 모두 인식주간 첫날을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의 세션으로 배정한 건 의도적이었습니다. 일단 첫날은 비워두고, 일요일은 일요일밖에 시간이 나지 않는 바바라님을 위해 또 비워놓고, 마지막 날은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의 피날레를 위해 비워놓은 뒤에, 남은 날짜들과 세션 강연자분들의 일정을 맞췄습니다.

맨 처음에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을 기획할 때만 해도 제가 인식하고 있던 당사자는 회고록을 출간한 저자들이 전부였어요. 그래서 저 자신을 포함에 연락이 닿는, 그리고 신상 노출이 어렵지 않은 저자분들을 모아 함께 얘기하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리서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애초에 몰랐던 또 다른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마침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됐던 김보람 감독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주인공인 박채영을 만나기도 했고, 남지영 점장님이 우연히 그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터넷에서 발견해 이미 오랫동안 섭식장애를 주제로 유튜버 활동을 해왔던 이진솔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한 사람, ‘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던 한 독특한 영상 감독 겸 전자음악 뮤지션과 인연이 닿은 건, 다름 아닌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들을 촬영해 줄 분을 물색하던 와중이었답니다! 그렇게 훨씬 다양하고 탄탄한 당사자 세션 패널이 꾸려질 수 있었죠.

<2024 섭식장애 인식주간> 두 번째 세션 모습.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가족들의 이야기 -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재능 많은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은 패널이 다 꾸려진 뒤로도 계속 새로 더 만나게 되었습니다. 포토그래퍼 곽예인, 아티스트 겸 기획자 이선민, 20년 전에 제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책 <다이어트의 성정치>를 쓰신 바로 그 한설아 교수님부터 시작해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는 이소림, 이소림 덕분에 만나게 된 그의 옛 입원 병동 메이트 이은아까지. 너무나 즐거우면서도 사실상 안타까운 현실의 방증으로, 첫 회 세션 패널로는 다 들일 수조차 없는 수의 반짝이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올해 진행한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날 세션에 저를 포함해 무려 8명이나 되는 당사자가 출연하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죠.

아. 제가 사랑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이 ‘반짝이는 사람들’의 명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많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아요. 그 사람들과 우리는 만나고,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기도 하고, 꽃다발이나 쿠키 같은 선물을 주고받고, 무엇보다 같이 일을 하고, 작당 모의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덕분에 앞으로도 쭉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날 세션에 패널로 섭외할 사람은 모자랄 일이 없을 듯합니다.

또 행운이라 생각하는 건, 당사자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가 무턱대고 연락을 드린 다양한 분야 전문가분들께서도 처음 들어보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이라는 행사에 강연자로 혹은 패널로 기꺼이 출연해 주셨다는 거예요. 물론, 삼고초려 전략도 여러 번 써야 했고,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건 잘 못하지만, 편지 쓰기로는 무슨 말도 할 수 있는 ‘김미영 팀장적 네티즌’인 제 특유의 기량을 살려 처음 초청을 고사하시고 사양하시는 분들을 끝내, 끝내, 결국엔 끝내 붙잡은 적도 많았습니다.

첫 회 때는 주로 출판과 글쓰기 분야 분들을 섭외했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당시 제 관심사가 거기에 쏠려 있었던 탓일 거예요. 작년 초에 처음 진행한 섭식장애 인식주간 때는 <여성의 수치심>, <빈곤 과정>, 그리고 비비언 고닉 선집을 편집한 박은아 편집자,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를 쓰고 제가 흠모하는 의료인류학자 아네마리 몰의 책 <바디 멀티플>을 공역한 임소연 교수님을 각각의 세션에 주역으로 초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끝마친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에서는 훨씬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모시고 그만큼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메릴랜드대 최은경 교수님을 모시고 디지털 헬스케어, 특히 디지털 멘탈헬스에 대해 이야기했고, 인제대 보건대학 김새롬 교수님, <의료비즈니스의 시대>,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를 쓴 김현아 교수님, 국내 유일의 섭식장애 식사치료 임상가 안주란 선생님을 초청해 현재 한국의 의료시스템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리타’라는 예명을 쓰는, (제 생각으론) 천재적인 평론가 이연숙과 함께 자기 서사의 윤리, 그리고 ‘자기이론(auto-theory)’에 대해 얘기하는 세션도 만들었었죠! 매번 7일 간의 전 세션에서 모더레이터로 참여해야만 하는 저로서는 세션마다 새로운 주제를 놓고 공부를 해야 하는 터라 절대 부담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기회가 저로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행복한 일을 응원받으며 할 수 있다니. 섭식장애 인식주간 기획자라는 역할은 지복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퍼블리시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도 행사 기획 초반부터 계획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원체 생업이 일반 기업에서 기획과 마케팅을 맡아 하는 일인 터라 - 그것도 벌써 19년 차입니다 - 보도자료를 쓰는 것부터 취재 요청을 하거나 연재 기획 기사를 기획하는 것까지 이미 어떻게 하면 될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첫 회 행사를 앞두고는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만드는 대안언론 <마인드포스트>와 연재 기사를 기획할 수 있었고, 두 번째 인식주간 때는 <오마이뉴스>, 그리고 <마인드포스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취재 요청에 응해주고 정말 좋은 기사를 써 주신 <시사인> 김영화 기자님, <한겨레> 이유진 기자님, <여성신문> 이수진 기자님, 그리고 두 번째 행사를 취재해 주신 <경향신문> 김향미, 민서영 기자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분들은 정말 진심으로 우리가 말하려는 문제와 주제를 숙고해 주셨고, 혹시나 기사를 쓰면서 민감한 지점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기사 초안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심사숙고해 주셨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 우리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친구들이 거의 각개전투 식으로 - 일 년 내내 맞서 싸워야 했던 상대 역시 언론이었습니다. 우리는 ‘프로아나’의 SNS 콘텐츠를 그중에서도 가장 선정적인 것으로 발굴해 쓰거나 섭식장애 경험자들에게 주로 최저 몸무게라든가 폭식 구토의 구체적인 면면을 물어 받아적는 식으로 ‘스펙터클 보여주기’에 급급한 언론들에 우리 입장을 밝히고, 취재에 불응했습니다. 그러나 엉성하고 저급한 보도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언론에 관한 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젠가 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다시 올 때를 기약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은 건,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우리가 글을 써서 내보내고 우리가 영상을 촬영해 퍼블리싱하는 게 오히려 좋은 전략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전후로 <일다>에서는 우리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친구들의 수기를 여러 편 실어주었습니다. <일다>의 조이여울 편집장님의 엄정한 안목과 능란한 전문성 덕분에 정말 좋은 섭식장애 수기 아카이브가 생겼고, 그 과정에서 저 역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제가 쓰는 족족 보내드리는 원고들을 토씨 하나 안 고치고 생짜 그대로 매번 신속히 발행해 주었어요. 덕분에 저는 다른 매체라면 ‘너무 어렵고’ ‘대중적이지 않다’고 퇴짜를 놓았을 글들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근영 기자님, 그리고 <마인드포스트>를 애초에 소개해 주신 송승연 선생님!

그리고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준비하면서는, 우리 스스로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꼭 하고 싶은, 해야 할 말이 있었고, 그걸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 경험자이자 증인인 몇몇이 직접 출연해 발언하는 것을 영상으로 공개하기 위해서였어요. 영상의 제목은 ‘입원 병동 에피소드’ 혹은 ‘살아 있다면, 응답하라!’였습니다. 우리나라에 - 아니, 서울에만 - 2000년대 초중반 생겨났다 금세 다 사라지고 만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에서 지낸 경험이 있던 저, 박채영, 이소림, 이은아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였고, 촬영은 고맙게도 미국에서 영상을 공부한 - 역시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인 - 양석영이 자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집본을 우리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에 공개했지요. 이소림은 미국에 있어 아쉽게도 촬영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직접 촬영한 스마트폰 영상을 보내주었고 양석영의 편집으로 그 역시 인스타그램에 같이 발행될 수 있었어요.

특히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막 끝낸 지금, 당사자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유튜브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있어 앞으로 섭식장애를 주제로 한 흥미로운 영상들이 많이 더 공개될 것 같습니다. 이 ‘반짝이는 친구들’의 작업, 기대해 주셔도 좋아요.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일종의 단체 형태로 활동하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저 고작 네 명 - 박지니, 남지영, 박채영, 이진솔 - 으로 구성된 비영리 임의단체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무슨 단체를 조직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첫 행사를 기획하던 때 러쉬 코리아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지원을 받으려면 단체 명의의 통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루 만에 단체 하나를 급조했던 것뿐이었어요.

인터넷으로 비영리 임의단체 등록 방법을 검색해 정관 같은 문서를 만들고, 세무서 근처의 도장집에 인장 디자인을 맡기고, 작년 1월 초 제 생일 당일에 그 모든 행정작업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세무서를 찾았습니다. 저를 ‘대표'로 쓰고 단체를 만들다니. 무슨 법인을 설립한 것도 아니고, 사업자등록번호를 발급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민망하고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다음으로 해야 했던 건 단체명의 통장을 개설하는 일이었죠. 유명 여자 연예인이 광고모델로 있는, 제가 사는 집 근처의 큰 은행 지점을 찾아간 건 사실 가까운 탓도 있었지만, 혹시나 그 연예인이 우리 행사에 관심 가져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기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죠. 최소한 2회째 행사를 마친 지금까지는요)

통장을 만들기까지는 거의 1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다리는 건 참으로 애타는 일이었지요. 겨우 통장을 발급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통장에서 이체할 수 돈의 한도는 하루에 100만 원뿐이었고, 그것도 매번 통장과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도장을 챙겨 지점 창구에 가야만 가능했습니다. 덕분에 도장과 통장을 저는 이제까지 1년 넘게 가방에 넣어서 다니고 있고, 행사가 끝나고 참여해 주신 분들께 수고비를 입급해 드리는 데에만 매번 한 닷새씩 걸려야 했답니다.

대한1형당뇨협회 김미영 대표님이나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하시는 무의 홍윤희 이사장님이 감탄스러운 활약상을 보이시는 걸 지켜보면서 저도 저만큼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단체를 좀 더 조직화하고 싶다는 열망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본격적인 조직을 갖추고 그 조직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무턱대고 결정해 시작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특히, ‘환자 단체’ 운영이 갖는 특유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동일한 한 가지 억압이나 불리함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복합적 어려움에 오랫동안 처해왔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에겐 해방적이고 회복적일 수 있는 주장이나 조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태로운 결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저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를 ‘환자 단체’로 규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라고 해도 지금 한창 가장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도 있겠고 스스로 이제 충분히 회복됐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섭식장애에 대한 논의를 이 병을 겪어 본 사람만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우리의 논의 주제를 섭식장애에만 한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섭식장애 인식주간에서 그래왔듯이 여성문제, 사회문제, 인류학적 혹은 문학적 화두를 다룰 수 있고,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과 의료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입장과 우리의 경험, 그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다른 사회적 약자 집단과 연대하고 해결책을 함께 찾아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래서 ‘잠수함토끼’였던 겁니다. ‘섭식장애’라는 구체적 병명을 단체명에 넣는 대신에요. 오래전 구소련에서는 잠수함에 토끼를 같이 태워 산소부족에 인간보다 민감한 토끼의 상태를 보고 함 내의 위험 상황을 일찌감치 대처할 수 있게 했다는 얘길 들었고, 그래서 우리 자신을 ‘잠수함토끼’에 빗댔습니다. 즉,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는 인격적으로 결핍된 개개인으로서 응당한 실패를 겪은 이들이 아니라 사회적 위기를 누구보다 일찍 몸으로 감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요.

제가 사회운동에 너무 힘을 쏟지 말고 그 대신 글을 쓰고 책을 내서 시간을 초월해 더 넓은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이로운 일이라고, 제게 반농담조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조언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당신 역시 젊은 시절 열악한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셨고, 특히 현장 구조 활동 중에 겪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들에 관해 얘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깨달은 건, 그 모든 사회적 부조리는 몇 번의 캠페인이나 구조활동으로 해소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런 활동가들의 작업은 어쩌면 시지프스의 작업처럼 끝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때부터는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고요.

저 역시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희한한 건 저 스스로는 제가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선생님께도 매번 그렇게 답해드리며 웃어버리는데요. 저는 사회운동을 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도 역시 제가 사회운동가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부산물(?)이 사회운동적 효과를 만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에요.

저는 제가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은, 회사에서 하는 일도 제게는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실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정말 제가 진심으로 실험하고 싶은 일에만 뛰어듭니다. 어떤 개입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달리 움직일는지, 어떤 기술이 사회 역동 속에 개입될 때 어떤 반향이 일어날는지가 너무나 궁금하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개입의 섬세하고 창의적이며 철학적인 측면들을 저 스스로 탐구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럴 기회를 찾고, 그런 일자리가 있으면 그 일을 하고, 그런 행사를 꾸밀 수 있다면 행사 진행을 기꺼이 맡는 식이었을 뿐이죠.

그리고 앞으로도 ‘사회운동가’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 것이 저희의 뜻하지 않은(?) 사회운동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정의와 절대선을 대변한다고 생각지 않고, 단지 의도가 선하다는 이유로 어떤 활동이 태생적으로 정당성이 담보된 일이 된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고민’과 ‘실험’ 쪽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쪽이 우리 모두에게도 더 유익하리라는 판단이고요.

이렇게 불확실하고 자기 합리성이 보장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움직여 실험을 감행하는 것 자체가 - 그리고 이 빠듯하고도 불같고 신나는 ‘놀이’에 다른 외로운 친구들을 불러들이고 함께하는 것 자체가 - 섭식장애라는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 상실의 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놓여나게 하는 최선의 지원이며, 치료이고, 사회운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지니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작가이자 활동가.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조그만 단체를 만들고

2022년부터 2년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진행했다.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2021)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