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 제주교구 나오미센터 라연우 활동가 인터뷰 🧶 오늘의 키워드
#이주민 #난민 #다문화
🤔 오늘의 질문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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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노트 “사람들은 경계를 긋고 네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묻지. 하지만 난 경계 자체가 되고 싶어” 영화 「미나리」에서 정이삭 감독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아칸소에 정착하며 겪는 이야기를 통해,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낯선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 그리고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일구어가는 과정은 인종과 국적을 넘어 공감을 불러일으켰죠.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런 경계 위에서 살아갑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그 경계에 선 채 13년간 자신만의 집을 지어왔습니다. 타국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고, 다른 언어로 일상을 채우며 두 문화의 경계가 되어 온 사람. “이제야 정말 집이 생긴 것 같다”는 그의 말에는 ‘떠다니는 삶’에서 벗어나, 마침내 단단한 땅을 밟게 된 안도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경계를 넘어 지은 집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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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찾은 새로운 집
2012년에 한국에 입국하셨죠. 시리아를 떠나 한국, 그리고 제주도를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젊은 남성들의 징집이 계속됐어요. 세 번의 검문을 거치고 고국이지만 시리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마침 동생이 제주도에 있었어요. 그렇게 한국에 왔죠. 물론 한국에서도 시리아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도 갈 수 있었죠. 하지만 시리아에서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있어 그냥 제주도로 내려왔어요. 그때 제주도에 있었던 동생은 서울로 갔지만, 저는 제주도가 좋아서 머물게 됐어요. 그렇게 제주도에서 자리를 잡은 지 벌써 13년이나 지났네요.
제주도에 머물면서 난민 체류 신청을 하셨죠. 그때 상황은 어떠셨나요?
이주 경험이 있다면 다들 비슷하겠지만 난민 신청 과정과 결과를 기다리는 게 힘들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건 똑같은데 결과가 계속 안 나오니까 “혹시 접수가 잘못됐을까? 불인정일까? 안 받아주는 건가?”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몇 번이고 결과를 물어보고, 언제쯤 알 수 있냐고 확인했어요. 그래서 출입국 사무소에서 제가 꽤 유명했어요.(웃음) 그렇게 1년이 지난 뒤에야 체류 허가를 위한 인터뷰를 볼 수 있었죠. 인터뷰까지 기다린 1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출입국 사무소의 심사 인터뷰는 현지 언어가 기준이에요. 하지만 제주도에 아랍어 통역사가 없었어요. 저도 영어가 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꼭 인터뷰를 보고 싶었어요. 그때 정말 간절했어요. 영어로 인터뷰를 준비했고 마침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었죠.
인도적 체류 허가 이후의 일상은 어땠나요?
한국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냈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제주도에서 처음 카페모카를 마셔봤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또 라테아트로 그림도 그려주시잖아요. 아트가 된 커피를 보면서 ‘이건 어떻게 만들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찾아보니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어요. 한국 청년들이 많이 쓰는 알바몬 앱을 다운받아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찾았어요.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바리스타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게 어려웠죠. 그래서 서귀포의 식당이나 다른 쪽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어를 익히고 다시 구직 활동을 했어요. 당시에는 서귀포에 살고 있었는데, 제주시에 있는 카페까지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사장님들께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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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로 근무하며 라떼아트를 하고 있는 모습 | ⓒ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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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라는 선택이 흥미롭네요. 바리스타로 일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손님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주로 주문받고 계산하고 끝이었죠.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커피를 시키고 나서 영수증을 드리고 가셨는데, 갑자기 돌아와서 영수증을 돌려주시더라고요. 받아보니 뒤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요.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웃음) 물론 연락은 안 했지만요. 그 외에도 신기하게 행동하는 손님들도 있었고, 조금 쌀쌀맞게 대하는 손님들도 있었어요. 정말 다양했죠. 하지만 카페에서 일하면서 한국어가 많이 늘었어요. 짧은 문장이라도 매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익숙해졌어요.
정말 한국 청년의 삶을 경험하셨네요.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도 들려주세요.
귀화는 시리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심했어요. 특히 한국에는 시리아 대사관이 없어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시리아 대사관을 통해 여권 연장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전이 계속돼서 그런지 여권 연장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저 “시리아에 가서 연장하세요”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어요. 국가가 저를 보호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저를 도와주지 않으려는 느낌을 받았어요.
타고난 국적으로 인해 정당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상에 회의감이 들었어요. ‘나라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죠. 그때 이미 한국에서 8년 넘게 살고 있었는데도 소속이 없는 느낌이었어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계속 떠다니는 삶이었죠. 아는 사람은 전부 한국인들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저는 시리아 이방인이었어요. 그런데 시리아 사람으로서 여권도 없었잖아요.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던 거죠. 그래서 귀화를 결심했고, 사회통합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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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후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 처음으로 찍은 증명사진 | ⓒ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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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이후에는 정말 ‘집’이 생긴 것 같았어요. 주민센터도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저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체감한 가장 큰 변화는 출입국 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이전에 3개월마다 체류자격을 연장하러 가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더 이상 출입국 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되고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는 용기도 생기고, 어디서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정말 한국 사람이 되셨네요. 한국 생활 중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을까요?
귀화하면서 국민선서를 하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귀화를 하면 국적법에 따라 국민선서를 해야 하거든요. 처음 허가 전화가 왔을 때는 믿지 않았어요. “귀화 허가 나왔다”고 하길래 “정말이냐”라고 물었죠. 내가 시리아 국적이고 난민이고 인도적 체류 허가자고, 한국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어리니까 ‘설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허가가 나오기 전에 하도 걱정을 했는지, 꿈에 당시 임기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셨어요. 진짜로요. 로또를 살까 하다가 안 샀어요. 하지만 로또를 안 사길 잘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이 한국 국민으로 받아준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국민선서를 하고 증서를 받는 순간, 그 느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증서를 받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정말 안전하고 의지할 수 있는 우리 집이 생긴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귀화 이후 처음으로 병원에 가서 신분증을 내밀 때의 느낌이 정말 달랐어요. 이제는 외국인 등록증이 아닌 주민등록증을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은행 계좌나 카드를 모두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면서 제가 정말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체감했어요. 뭘 먼저 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지만, 하나하나 바꿔나가는 게 행복했고 또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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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허가 후 국민선서를 하는 모습 | ⓒ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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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을 거쳐 한국인이 되셨네요. 이름도 너무 예쁜 한국이름이에요. 이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귀화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 이름을 써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저는 제 생활 편의를 위해 귀화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 귀화를 했으니 당연히 한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을 정할 때 성씨를 먼저 정해야 했는데, 원래 제 성씨는 ‘라바비디’에서 첫 글자를 빼서 ‘라(羅)’씨를 선택했고요. 이름은 제 나이와 어울릴 수 있는 걸 찾아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명소에 가서 지었어요. 진짜 한국 사람들처럼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가지고 가서 말씀드렸더니 ‘넓을 연(衍)’, ‘임금 우(禹)’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처음에 작명소에서도 놀랐죠, 아이 이름을 짓는 게 아니라 제가 하겠다고 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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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에서 : 중간자로 살아가기
귀화를 준비하던 중 바리스타에서 난민 지원 활동가로 직업을 전환하셨어요.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처음부터 활동가로서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때의 저는 바리스타로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었고, 그 카페에서 오래 일하면서 매니저로 승진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페이스북을 봤는데, 모르는 사람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아랍어 메시지로 도와달라고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제주도로 와서 난민 신청을 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70명이나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하지만 당시에는 제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도움을 받으라고 안내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제주시청 근처를 걸어가는데 아랍어가 들렸어요. 여행객일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에 한국에 온 500명의 예멘 난민 중 일부였어요. 출입국 사무소에 가니 예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죠. 마침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저를 잘 알고 있었어요. 혹시나 싶어 “통역이 필요하면 지원하겠다”라고 여쭤보니 바로 요청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리스타 일과 함께 아랍어 통역도 했죠. 통역과 더불어 텐트나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도 했어요. 당시 예멘 난민들이 거처가 마땅치 않아 정말 길에서 머무는 일들이 잦았거든요.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나오미센터 신부님께서 난민 지원 활동가 제안을 해주셔서, 지금은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일을 했으니, 벌써 7년 차네요. 주로 한국에 처음 들어온 분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본인을 ‘중간자’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그 사람들의 말도 다 이해하고, 여기 있는 한국 선주민 분들의 말도 다 이해해요. 그래서 어떤 쪽의 편도 들 수 없죠. 예멘 분들이 어떻게 한국으로 왔고, 왜 왔는지 다 듣고 이해했거든요. 하지만 제주도 분들의 불안감과 무서움도 다 이해해요. 무작정 “나가라”라고 할 수도 없고, 다른 한편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할 수 없죠. 그래서 늘 중간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특히 통역을 하는 사람은 중간을 유지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계속 중간을 유지했던 것 같아요. 때로는 힘들지만 양쪽을 다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저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다만 서로를 설득시켜야 할 때, 그리고 설득의 난이도가 높을 때, 일이 두 배가 되죠.
귀화 그리고 난민 지원 활동가로의 전환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크게 느낀 건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해요. 전에는 제가 약하고 힘들고 아프니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많은 분들이 옆에 계셨어요. 저는 옆에 있었던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요. 친구들이라든지, 저를 도와준 단체나 활동가들, 낯선 외국인을 고용해 주신 사장님, 진료비를 싸게 해 준 의사 선생님들이요.
이제는 한국인이 되었고, 상황이 많이 나아졌으니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법무부 사회통합멘토단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정말 극적인 변화죠. 이제는 이주민뿐만 아니라 여기 도움이 필요한 한국인들도 아낌없이 돕고 싶어요. 제가 받은 도움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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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발표하는 모습 | ⓒ광주세계인권도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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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꾸는 꿈 : 내일을 향한 작은 변화들
난민 지원 활동을 하면서 느낀 한국 사회의 변화가 있을까요?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이주민에 대한 제도가 좋아지고 있다고 느껴요. 정책적으로는 인도적 체류 허가자도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을 가입할 수 있게 되었죠. 비자를 연장하는 것도 예전처럼 어렵지 않고요. 그럼에도 아직은 부족한 부분도 있죠. 특히 요즘에는 난민이나 이주민에 대한 인식이 양극화되고 있다고 느껴요. 기존에 무던하게 바라보셨던 분들은 이제 도움을 건네는 단계인데요. 과거에 난민과 이주민을 좋지 않게 보셨던 분들은 극단적으로 경계하거나 싫어하시기도 하죠.
그래서 인식개선을 위한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최근 2-3년 간은 특히 더 많은 요청을 받았어요. 작년에는 세계인권도시포럼에서 종교혐오와 차별에 대해 발표도 할 수 있었고, 난민 인식개선을 위한 연극 무대에도 설 수 있었죠. 이주민의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위한 이주민 인식 개선 교육을 많이 요청해 주셨어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인식 개선을 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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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연극 불투명 인간 포스터 (우)연극 무대에 선 라연우 님의 모습 | ⓒ연극공동체 다움, 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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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이주민/난민의 자녀를 많이 만났을 텐데, 이 친구들은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나요?
한국에서 자라는 이주배경 아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어요. 한국인 부모가 있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대체로 한국 사람처럼 자라납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죠. 제가 정말 걱정하는 건 해외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온 이주민이나 난민 자녀들이에요. 특히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가정의 아이들 상황이 어려워요. 이 아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릴 때 와서 한국어가 모국어보다 훨씬 더 편한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랐는데도, 체류 자격은 부모님과 연동되어 있어서 부모님의 체류 자격이 취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어떤 아이들은 태어난 나라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도 성인이 되거나 대학을 졸업해도 한국에서 정식으로 취직할 수 없고, 영주권이나 귀화에 도전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라고 한국어가 더 편한데도 말이죠. 그래서 이 아이들만큼은 별도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체류 자격과 상관없이 한국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에게는 취업 기회나 영주권, 귀화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다양성을 더 포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미 지금 다양하게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보일 수 있는데, 고개를 돌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현재 한국에는 약 5%의 이주민*이 함께 살고 있고, 어디를 가든 이주민들이 있는 나라가 됐는데도 앞만 보고 있는 게 아쉬워요. 제일 아쉬운 건 한국인이라고 해도 안 믿거나 장난스럽게 대하는 태도예요. 이런 사소한 태도에 상처받거든요.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고 했을 때 웃는 사람들도 있고, “아 네네”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시리아에서 태어났고 한국으로 귀화했습니다”라고 설명하면 “그럼 외국인이네요”라고 하는 분들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계속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냥 포기해요. 너무 설명하기 어렵고 피곤하니까요.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증명하려고 하면 끝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웃고 넘기거나, 중요한 상황이 아니면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한국 생활 13년이 지나니까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그냥 제 삶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결국 누가 뭐라고 하든 제 마음속에서는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법무부 ‘2013년 12월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은 250만 8,000명으로, 한국 전체 인구의 4.89%에 해당한다.
제주도에서 활동하시면서 한국의 지역 문화나 공동체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면요?
제주도는 제가 살았던 시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지만, 의외로 공통점을 발견하게 돼요. 지역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하고, 외지인에게는 처음에 조금 닫혀 있는 듯하지만 일단 받아들여지면 깊은 관계가 형성되죠. 제가 서귀포 시골 지역에 살다가 제주시로 이동할 때는 마치 제주 청년들이 서울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그만큼 제주도 내에서도 지역 간 문화 차이가 있거든요.
제가 제주도에 13년 살면서 느낀 건, 이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조금 무뚝뚝해 보여도 정이 깊다는 거예요. 바리스타로 일할 때나 지금 활동하면서나 많은 제주 분들이 저를 돕고 응원해 주셨어요. 지금은 제주도가 제 고향이나 다름없고, 도시의 번잡함보다는 이곳의 자연과 여유로운 생활 방식이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물론 가끔은 육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특히 작년에는 주변 사람들이 육지로 많이 떠났거든요. 하나둘씩 떠나는 걸 보고 ‘나는 계속 여기 있는 게 맞나’, ‘서울에 가지 않고 제주에서 뭘 놓치고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제주에서 형성한 관계들이 저를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해요. 제주도에서의 안온한 삶을 생각하면 결국엔 떠나지 못하게 돼요. 저도 그냥 여기 사는 한국 청년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활동과 계획이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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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진행한 난민 인식개선 교육 | ⓒ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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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학교에 가서 이주민과 난민 관련 인식 개선 강의를 많이 하고 있어요. ‘난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데, 반응이 정말 좋아요. 초등학생들은 새로운 얼굴을 보면 정말 신기해하고 재밌어해요. 중학생들도 반응이 좋고, 고등학생들은 조금 피곤해하긴 하지만요.(웃음) 또 여기 나오미센터에서 계속 일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이주민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포함해서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 | 윤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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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경계를 가로질러 자신만의 집을 지어낸, 라연우 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서로 도우며 경계를 경계를 허물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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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wimmers>
셀리 엘 호세이니, 영화, 2시간 15분
시리아 난민이자 올림픽 수영선수인 유스라 마르디니의 실화를 담은 영화입니다. 국가대표 올림픽 출전을 꿈꾸는 수영선수 자매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시리아를 떠납니다.
어두운 에게해에 뛰어들어 함께 피난 온 난민들을 구하고, 강인한 마음과 뛰어난 수영실력으로 영웅이 되는 두 자매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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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기완>
김희진, 영화, 2시간 13분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탈북자 기완이 낯선 땅 벨기에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자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작가의 말과 함께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는 난민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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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이트리스>
엠마 프리맨, 넷플릭스 시리즈, 6부작
호주 난민수용소에 얽힌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난민 정책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시리즈입니다. 특히 난민수용소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행과 성적 학대, 자해 등 난민수용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습니다.
자유를 원하지만 수용소에 갇혀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난민 정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랄게요. |
📖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소윤, 도서, 274쪽
누구나 품고 있는 꿈과 희망, 작은 소망과 연결되는 ‘작은 별’을 꺼내 볼 수 있는 시간과 여운을 주는 책입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순간은 있지만, 언제나 영원할 수만은 없죠. 빛이 나지 않는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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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토크 독자 의견함
지난 테이블토크(청소년을 위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보내주셨던 피드백을 소개해요. 이번주 레터를 읽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단에 의견 보내기 버튼을 눌러 말씀해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은 더 나은 콘텐츠를 고민하는 에디터에게 큰 힘이 된답니다-!😉
✏️ 청소년주거권운동이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성과들을 알려주셔서 매우 반가워요!
💭 저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목소리를 내주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더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 집을 탈출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꾹 참고 살아가야했던 어린 날의 제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가정을 나왔기 때문에 거주할 곳와 돈이 없고,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하고,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쉼터를 이용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탈가정 청소년들의 현실이 마음이 아픕니다.
💭 담담하게 꺼내주신 얘기에 상처가 나고 아무는 과정이 느껴졌어요. 청소년 주거권 운동을 통해 앞으로는 많은 청소년들이 집다운 집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독자 님도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 합니다!❤️🩹(by. 에디터 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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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테이블토크는 어떠셨나요?
감상, 의견, 사연, 안부 등 어떤 것이든 좋아요!
에디터가 꼼꼼히 읽어보고 답글 남기겠습니다🤗 아래 버튼을 클릭해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어떤 내용이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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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Talk | 사회혁신가 인터뷰와 사회혁신 모델/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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