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 노트

『자기만의 방』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유명한 선언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우리 사회의 독립적인 삶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죠.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은 단순한 공간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독립성,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압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했죠. 오늘날 독립적인 삶을 선택한 이들은 어쩌면 '자기만의 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만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팟캐스트 ‘비혼세’를 운영하는 곽민지 작가와의 대화는 기존 틀에서 벗어난 삶의 여정을 탐색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관습적인 기대에 의문을 던지는 용기, 주변의 시선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결단, 그리고 자신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창의성이 담겨 있습니다. 울프가 주장했던 경제적 독립과 자율성의 중요성은, 오늘날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의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테이블토크는 단지 하나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ll the Single Ladies, 비혼세의 시작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보통은 예능 작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회사를 다니다가 예능 작가로 전업을 해서 지금 15년 차 예능 작가로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비혼세’라는 팟캐스트도 운영하고 있는 곽민지라고 합니다. 팟캐스트는 얼마 전에 5주년을 맞아서 이제 6년 차가 됐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정체성이죠. 반려견 김정원을 키우고 있는 정원이 언니이기도 해요. 정원이는 원래 제가 임시 보호로 데리고 있었는데, 그냥 평생 서로의 정원이 되자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어요. 저는 곽민지이지만 강아지 이름은 김정원인 건 성을 물려주고 싶어서였어요. 저는 성을 물려주는 게 이 사람의 어떤 특징을 닮았으면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정원이가 겁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겁이 많고 다정하지만 강인한 사람을 닮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작사가 김이나, 배구 선수 김희진에게서 '김'을 따서 김정원이라고 지었어요.

팟캐스트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예능 작가로 일하던 중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었죠. 그 기간에 예상하지 못하게 예능 프로그램이 많이 사라졌어요. 마침 그때 번아웃으로 일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잠깐 일을 쉬다가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됐어요.

팟캐스트 ‘비혼세’를 처음 만들 때쯤에는 결혼 생활에 대한 예능 프로그램이 되게 많았어요. 혼자 사는 사람을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명할 때도 잘 사는 모습을 다 보고, 마지막 질문으로 "결혼을 안 해서 외롭지 않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이런 얘기를 꼭 하더라고요. 한참 재밌게 잘 사는 얘기를 보고 마지막 질문은 결혼으로 귀결되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어요. 그래서 비혼인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들었어요.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 찾는 동반자적 관계

책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에서 비혼의 삶에 대해 얘기하셨는데요. 결혼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오히려 결혼이 어떤 결심이 필요하고, 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비혼은 원래 비혼이잖아요. 결혼한 상태로 태어나서 사는 게 아니니까 비혼이 된 계기는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반대로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서 되게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죠.

어릴 때는 막연히 친구들이 다 결혼하고, 회사에 다녔을 때도 동기들도 가정을 이루고 하니 나도 나중에 저런 때가 오겠지, 2차 성징처럼 저런 마음이 생겨나겠지 했거든요. 그런데 예능 작가로 일하면서는 전형적인 삶을 산 사람들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분들을 더 많이 목격했어요. 물론 그게 인상 깊기도 했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비혼의 삶을 선택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엄마 아빠가 진짜 지금도 서로 너무 사랑하는 부부인데, 유일한 두 분 사이의 마찰은 결혼 제도에서 비롯되더라고요. 그래서 만약에 가족으로 결합되지 않았으면 좀 더 두 분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결혼 자체에 대한 막 큰 환상이 없었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30대 서울 거주 여성, 작가, 프리랜서, 팟캐스트 진행자, 정원이 언니, 둘째 딸 등 다양한 정체성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정체성과 이건 잃어도 되겠다 싶은 건 무엇인가요?

제일 애정이 가고 잃고 싶지 않은 정체성은 정원이 보호자인 것 같아요. 사실 나머지는 잊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희 엄마 아빠의 자식인 것도 잊고 살아도 되고, 팟캐스트 진행자, 작가 이런 것도 다 잊을 수 있는데요. 아무래도 사람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정원이는 명백한 약자잖아요. 저는 약자의 보호자이고요. 오늘처럼 인터뷰 일정을 잡을 때나, 운동 일정을 잡을 때나, 예능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나, 여행 갈 때, 그리고 하루에 몇 시에 일어날 건지 몇 시에 잘 건지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바로 강아지의 보호자인 것 같아요. 

잃고 싶은 정체성은 30대 서울 거주 여성이요. 제가 비혼 생활 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일상이 어쩌면 특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집 밖으로 나가면 편의시설이 다 있는 서울에 산다는 것도 큰 특혜죠. 그리고 이성애자 여성인 것도, 4년제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인 것도 누군가에게는 특혜가 될 수 있겠더라고요. 팟캐스트를 하면서 많은 사연들을 받다 보니까 정말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내가 규정한 세상이 정말 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청취자분들이 하나씩 알려주시는 덕분에 조금씩 시야를 넓혀가고 있어요.

보통 비혼을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돌봄으로도 연결되잖아요. 혹 돌봄이나 노후 문제 등에 대한 고민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돌봄은 세대나 결혼 유무를 떠나 모두가 관심을 보이는 화두인 것 같아요. 저만 보더라도 비슷한 프리랜서끼리 아침 식사를 인증하는 카톡방을 만들었거든요. 매일 식사를 인증하던 사람이 사진을 안 올리면 그때부터 주변을 다 뒤지기 시작하는 거죠. 일종의 비상연락망과 안전망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1인 가구의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카톡방 친구들끼리 관계망을 만들어서 우리 같이 늙어가자는 얘기를 하지만, 사실 개인들끼리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도적으로 갖춰져야 되는 문제라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하죠. 사실 돌봄 문제에 관해서는 비혼자로서 느끼는 위기감보다 이제 환갑을 훨씬 넘으신 부모님을 둔 자녀로서 느끼는 필요성이 훨씬 더 큰 것 같아요. 저는 비혼인이지만 기혼 유자녀 가족의 자녀이기도 해서, 부모님의 돌봄에 대한 걱정도 많거든요. 비혼인데 혼자 늙어도 괜찮겠냐는 질문은 달리 말하면 기혼 유자녀 가족의 경우 자녀에게 모든 돌봄 의무가 전가되는 게 당연하다는 메시지기도한데, 실제로 그렇게 작동할 수 없는 가족이 훨씬 많아요. 사회적으로 돌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논의할 때라고 생각해요.

비혼의 큰 삶을 담기엔 부족한 10평

비혼세 팟캐스트를 시작하신 2020년과 비교했을 때, 최근 비혼에 대한 담론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시나요?

진짜 많이 느끼는 변화가 있어요. 대표적인 게 옛날에는 네이버에서 '비혼세'를 검색하면 저희 팟캐스트만 나왔거든요. 왜냐하면 그때는 결혼을 안 하는 사람한테 어떤 불이익을 주자, 더 세금을 내야 된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쓰던 단어가 '싱글세'였어요. 그런데 '비혼'이라는 단어가 퍼지면서 '비혼세'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서 요즘 검색을 하면 세금 얘기가 엄청 많이 나와요.

그때만 해도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새 팀에 들어갔을 때 "결혼을 안 하셨냐"고 결혼 유무를 물어보곤 했는데, 요즘은 "안 했다"고 하면 "그러면 혹시 비혼이세요?"도 추가로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냥 예전에는 무조건 결혼을 했거나 결혼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밖에 없거나 이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선택지도 생긴 거죠. '미혼'이란 말을 쓰지 말고 '비혼'으로 쓰자고 하는 인식도 많이 확산됐고요.

그리고 결혼을 권장하는 것 자체가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이성애자들한테만 해당하잖아요. 만약에 60-70대 정도 되신 분이 그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려고 하면 그건 또 사회적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로 취급하죠. "젊은 시절 다 지나서 왜 그렇게 하려고 하냐"라고 하는 경우처럼요.

저는 비혼에 대한 이야기가 사회 구성 전체로 확장되는 게 좋고, 확장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은 때가 언제든 하고 싶을 때 하고, 결혼했다가 스스로 너무 힘들거나 부당한 상황에 놓인다면 언제든지 결혼을 파기할 수도 있고요. 또 이혼한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고, 이혼이 그 사람의 멍에가 되지 않는 것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비혼이고 싶은 사람, 결혼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이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사람 모두가 자유롭게 차별받지 않고 뜻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앞서 차별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현재 제도 중 비혼을 차별하는 제도가 있다고 보시나요?

아무래도 제일 크게 체감하는 건 주거인 것 같아요. 주택 청약도 그렇고, 청년 주택도 1인 가구는 10평 이내로 구획된 경우가 많잖아요. 1인 가구도 ‘국민평수’에 살고 싶거든요. 제일 많이 고민하는 게 주거인 것 같아요. 주변에도 '비혼 실패자 커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이 친구들은 계속 동거를 하다가 이사를 가야 되는데 보증금 문제로 은행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 당시에는 신혼부부에게 대출 우대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혼인 신고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가끔 막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를 보면 나중에 저 아파트들이 공실이 될 텐데, 우리 같이 비혼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레지던스처럼 비혼 공동체 아파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걱정하는 것만 보더라도 ‘주거’가 1인 가구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지만, 가장 차별받는 제도인 것 같아요.

대안적 가족 형태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사례 중 흥미롭거나 인상 깊었던 것이 있으신가요?

저희 부모님을 보면서 프랑스의 팍스(PACS)*같은 제도로 혼인 신고 안 한 분들처럼, 가족으로 결합되지 않았으면 좀 더 두 분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프랑스의 팍스는 결혼보다 좀 더 느슨한 형태의 시민연대계약인데, 법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결혼보다는 부담이 적은 제도거든요.

사실 해외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와 가족을 인정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많이 발전해 있어요. 저는 비혼도 특권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게 비혼이지만, 결혼하고 싶어도 혼인 신고를 못하는 동성 커플 같은 경우는 오히려 그런 선택지조차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는 이런 다양한 관계도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들이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일본에서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 재일교포 친구의 경험이었어요. 이 친구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로 수학여행은 평양으로 가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경험을 했거든요. 누군가는 이 친구를 일본 사람, 한국 사람, 북한 사람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또 반대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인식하죠. 친구가 살아온 경험을 보면 굉장히 특별하고 어떤 카테고리로만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결국 타이틀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이야기가 되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결혼인지 비혼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결혼한 사람 중에 저랑 더 결이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저라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편 갈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껴요. 결국 고정된 틀을 넘어서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를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죠.

글 | 윤성원

📺EBS <건축탐구 집> - 조립식 가족, 친구와 살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클립, 21분

70대 할머니 세 친구가 집을 지어 사는 에피소드입니다. 각자 잘하는 역할을 맡아 회계, 유지보수, 요리를 담당하고 계세요. 노령연금을 모아 공동의 생활비로 쓰며, 아침은 함께 먹는다는 규칙도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결혼 외의 공동체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랄게요!